해가 없는 날의 시간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를 봤다. 최민식의 장영실과 한석규의 세종이 별을 올려다보는 장면들이 좋았지만, 이상하게 오래 남은 건 물시계를 만드는 장면이었다. 물이 떨어지고, 항아리가 차고, 구슬이 굴러 종이 울린다.

저 시대에 시간이 중요했다는 건 안다. 그런데 막상 내가 시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막막했다. 낮에는 해시계가 있다. 그런데 흐린 날은? 비 오는 날은? 밤은?
해시계는 해가 있어야만 대답한다. 하늘이 입을 닫는 날 시간을 알려면 하늘 말고 다른 무언가가 필요했다. 장영실은 그 답을 물에서 찾았다.
궁금한 게 꼬리를 물었다. 물시계는 얼마나 정확했을까. 물은 언제, 얼마나 채웠을까. 항아리에 물이 줄면 수압도 줄어서 흐르는 양이 달라질 텐데, 그건 어떻게 해결했을까. 그리고 그 시계는 이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Claude와 함께 자료를 뒤지고, 계산을 하고, 그림을 그려 봤다.
조선의 시간은 두 종류였다
먼저 조선 사람들이 시간을 어떻게 나눴는지부터 짚어야 한다. 지금 우리처럼 하루 24시간을 똑같이 자르지 않았다.
| 구분 | 방식 | 특징 |
|---|---|---|
| 낮과 하루 전체 | 12시(時) · 100각(刻) | 1시진 = 2시간, 1각 = 14.4분. 길이가 일정한 정시법 |
| 밤 | 5경(更) · 25점(點) | 해 진 뒤부터 해 뜨기 전까지를 5등분. 계절마다 길이가 바뀌는 부정시법 |
밤의 규칙이 재미있다. 해가 지고 2.5각(36분)이 지난 때를 혼(昏), 해 뜨기 2.5각 전을 신(晨)이라 했다. 그 사이를 다섯으로 나눈 것이 1경~5경이고, 각 경을 다시 다섯으로 나눈 것이 점이다. "삼경에 만나자"는 말의 그 경이다. 문제는 밤의 길이가 계절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겨울밤은 길고 여름밤은 짧다. 그러니 1점의 길이도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었다 한다.

직접 계산해 보니 동지의 1점은 약 32분, 하지의 1점은 약 19분이다. 해시계는 이걸 모른다. 물시계는 이걸 알아야 한다. 물은 계절과 상관없이 같은 속도로 흐르기 때문이다. 이 간극을 메우는 게 장영실의 숙제 중 하나였다.
왜 '스스로 치는' 시계가 필요했나
자격루(自擊漏)는 1434년(세종 16)에 완성되어 경복궁 경회루 남쪽의 보루각에 설치되었고, 그해 음력 7월 1일부터 나라의 표준시계가 되었다. 이름 그대로 '스스로(自) 치는(擊) 물시계(漏)'다.
물시계 자체는 새로운 게 아니었다. 신라 때 이미 누각전이라는 관청이 있었다. 문제는 사람이었다. 기존 물시계는 관원이 밤새 눈금을 지켜보다가 시각을 알려야 했다. 깜빡 졸거나 잘못 읽으면 시각이 틀렸고, 착오를 일으킨 관원은 무겁게 벌을 받았다. 세종은 이걸 고치라고 했다.
말하자면 자격루는 졸음과 곤장을 줄이기 위한 자동화 프로젝트였다. 600년 전에도 자동화의 출발점은 지친 사람이었던 셈이다.
자격루는 어떻게 움직였나
구조는 크게 네 단계다.

- 물을 고르게 흘린다. 크기가 다른 파수호(播水壺, 물을 내보내는 항아리)를 계단식으로 놓는다. 기록상 파수호는 4개였다. 지금 남아 있는 1536년(중종 31) 제작 유물에는 지름 약 94cm의 대파수호 1개와 소파수호 2개가 있다.
- 물 높이를 잰다. 맨 아래 길쭉한 수수호(受水壺, 물을 받는 통)에 물이 차오르면, 그 위에 뜬 살대(浮箭)가 함께 올라간다. 현존 수수호는 높이 196cm, 안지름 33cm다.
- 높이를 신호로 바꾼다. 살대가 정해진 높이에 닿으면 동판 구멍에 올려 둔 작은 구슬을 밀어 떨어뜨린다. 작은 구슬이 큰 쇠구슬을 굴린다.
- 소리로 알린다. 쇠구슬이 지렛대를 치면 인형이 움직여 시(時)는 종, 경(更)은 북, 점(點)은 징을 울린다. 12지신 인형은 시각 팻말을 들고 나타났다.
나는 3번에서 오래 멈췄다. 물의 높이는 연속적인 값이다. 그걸 "구슬 하나가 떨어졌다/안 떨어졌다"라는 사건으로 바꾼다. 15세기의 아날로그-디지털 변환기다. 작은 구슬의 힘을 큰 쇠구슬로 키우는 건 신호 증폭이고. 회로 기판 대신 청동과 나무로 만든 것뿐이다.
첫 번째 적, 수압
이제 가장 궁금했던 질문이다. 항아리에 물이 줄면 수압이 줄고, 흘러나가는 물의 양도 준다.
물리학으로 말하면 토리첼리의 법칙이다. 구멍에서 나오는 물의 속도는 수면 높이의 제곱근에 비례한다. 수위가 반으로 줄면 유량은 약 71%로 떨어진다. 시계로 치면 시간이 점점 느리게 간다는 뜻이다. 하루가 저물수록 시계가 게을러진다. 얼마나 심각한지 감을 잡으려고 간단한 물리 모형을 만들어 돌려 봤다. 항아리 크기는 현존 유물 치수를 쓰고, 수수호가 12시간 동안 1.8m 차오르도록 맞췄다. 그리고 네 가지 경우를 비교했다.

| 방식 | 12시간 뒤 오차 |
|---|---|
| 항아리 하나, 물 보충 없음 | 약 82분 느려짐 |
| 항아리 하나 + 2시간마다 보충 | 약 14분 |
| 계단식 3단, 물 보충 없음 | 약 11분 |
| 계단식 3단 + 2시간마다 보충 | 약 3분 |
항아리 하나로 버티면 반나절에 한 시간 넘게 틀린다. 이건 시계가 아니라 기분이다.
장영실의 답 1: 계단식 항아리
중간에 항아리를 끼워 넣으면 놀라운 일이 생긴다. 맨 위 항아리의 수위가 떨어져도 중간 항아리가 그 변화를 한 박자 늦게, 그리고 훨씬 작게 전달한다. 중간 항아리는 일종의 완충 탱크다. 전자공학 용어로는 저역통과 필터, 출렁임은 걸러내고 큰 흐름만 통과시킨다.
계산상 중간 항아리가 하루 안의 수위 변화를 흡수하는 시간 상수는 몇 시간 단위였다. 하루치 물을 다루는 시계에는 딱 맞는 크기의 버퍼다. 계단식 배치 하나로 오차가 82분에서 11분으로 줄었다.
장영실의 답 2: 물은 '같은 양'이 아니라 '같은 높이'로
처음엔 매번 같은 양을 정확히 붓는 게 핵심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계산해 보니 아니었다. 중요한 건 맨 위 항아리를 넉넉한 높이로 유지하는 것이다. 수위가 높을 때는 조금 줄어도 유량 변화가 작다. 높이 0.55m에서 몇 cm 줄어드는 것과, 바닥 근처에서 몇 cm 줄어드는 건 전혀 다르다.
그러니 관원이 할 일은 정밀한 계량이 아니라 맨 위를 자주, 넉넉히 채워 두는 것이었다. 물을 붓는 순간 생기는 출렁임은 아래 항아리들이 삼켜 준다. 계단식 구조와 보충을 같이 쓰면 오차가 3분 수준까지 내려간다. 정밀함을 사람의 손이 아니라 구조에 맡긴 설계다.
장영실의 답 3: 매일 0점으로 돌아가기
수수호는 2개였다. 하나에 물이 차는 동안 다른 하나는 비우고 구슬을 다시 장전해 둔다. 하루가 끝나면 물길을 옆 통으로 옮긴다. 이렇게 번갈아 쓰면 시계를 멈추지 않고도 매일 0점 리셋을 할 수 있다.
이게 중요하다. 오차가 하루 안에 갇힌다. 오늘 3분 틀려도 그 3분이 내일로 넘어가지 않는다. 쌓이지 않는 오차는 관리할 수 있는 오차다.
장영실의 답 4: 계절마다 갈아 끼우는 잣대
앞에서 본 고무줄 같은 밤 문제. 물은 일정하게 흐르는데 1점의 길이는 계절마다 다르다. 해법은 눈금 쪽을 바꾸는 것이었다. 세종 때는 절기에 따라 눈금 간격이 다른 밤 잣대 11개를 번갈아 끼웠다. 동지 무렵이 제1전, 춘분·추분 무렵이 제6전, 하지 무렵이 제11전이다.
2021년 서울 인사동의 한 땅속에서 이 장치의 일부가 실제로 나왔다. 한글 금속활자, 일성정시의 부품과 함께 출토된 동판에는 구멍이 일정 간격으로 뚫려 있었고, 간격이 서로 다른 동판 3개가 확인됐다. 연구진은 구멍 간격의 비율로 각각을 1번, 3번, 6번 잣대로 판별했다. 기록 속 '계절별 잣대'가 손에 잡히는 물건으로 나타난 것이다.

나도 하나 검산해 봤다. 지금의 천문 계산으로 하지 무렵 한양의 밤(혼~신) 길이를 구하면 약 483분이다. 세종 때 제11전 기록에 적힌 1경 1점 시작과 5경 5점 끝 사이를 계산하면 약 482분이다. 580년 전의 눈금과 오늘의 천문 계산이 2분 안쪽에서 만난다. (동지 쪽 기록은 해석이 엇갈려 비교에서 뺐다.)
장영실의 답 5: 하늘로 검산한다
마지막 안전장치는 하늘이다. 낮에는 앙부일구 같은 해시계로, 밤에는 1437년에 만든 일성정시의로 별을 보고 시각을 맞췄다. 물시계가 박자를 세는 메트로놈이라면 해와 별은 음정을 바로잡는 조율사였다.
하늘이 맑은 날 시계를 맞춰 두면, 흐린 날과 밤에는 물시계가 그 시간을 이어 간다. 해시계와 물시계는 경쟁자가 아니라 교대 근무자였다.
그래서, 얼마나 정확했을까
솔직히 말하면 모른다. 당시 오차를 재서 적은 기록은 없다.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는 식의 표현이 자주 보이지만, 근거가 붙은 측정값은 찾지 못했다. 복원품으로 정밀도를 시험한 결과도 공개된 자료에서는 보지 못했다.
대신 추정할 수는 있다.
- 구조(계단식 항아리)와 운영(수시 보충)을 함께 쓰면, 물리적으로는 하루 수 분 수준까지 갈 수 있다.
- 매일 리셋하고 하늘로 검산했으니 오차가 날마다 쌓이지 않는다.
- 다만 이건 잘 관리될 때 이야기다.
마지막 조건이 생각보다 무겁다. 자격루의 역사는 정확도보다 유지보수의 역사에 가깝다.
- 1455년(단종 3), 자동 시보 장치가 멈췄다. 고칠 사람이 없었다. 장영실 없이는 장영실의 기계를 고칠 수 없었던 것이다.
- 1469년(예종 1)에야 다시 돌아갔다.
- 성종 이후 자동 시보와 실제 시각이 다시 어긋나기 시작했고, 결국 1534년(중종 29) 새로 만들기 시작해 1536년 완성했다. 지금 남아 있는 유물이 이때 것이다.
- 1791년(정조 15)에도 2경 1점을 초경 2점으로 잘못 알고 북과 징을 친 관원들이 문책을 받았다.
정확도는 기계가 혼자 갖는 성질이 아니었다. 기계와 사람과 하늘이 같이 만드는 시스템의 성질이었다. 그리고 시스템의 가장 약한 고리는 언제나 사람이었다. 이건 지금도 그렇다.
그 다음 이야기: 물에서 톱니로, 톱니에서 국가로

자격루 다음의 이야기는 크게 세 갈래로 흘렀다.
하나, 더 화려해졌다. 1438년 흠경각에 세운 옥루는 자격루의 확장판이었다. 종이로 만든 산 위로 금빛 해가 하루 한 바퀴 돌고, 산 둘레에는 백성의 사계절 농사 풍경을 꾸몄다. 시간을 알리는 기계가 통치 철학을 말하는 기계가 되었다.
둘, 역법이 바뀌었다. 1653년(효종 4) 시헌력을 쓰면서 하루를 100각이 아니라 96각으로 나누게 되었다. 이때부터 자격루는 자동 시보 부분을 떼고 물시계 부분만 쓰였다. 눈금 체계가 바뀌면 기계도 바뀌어야 하는데, 그 정교한 자동장치를 다시 설계할 사람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셋, 물이 톱니에게 자리를 내줬다. 송이영의 혼천시계(1669년으로 전하지만 제작 연대에는 이견이 있다)는 물 대신 추와 톱니바퀴로 움직였다. 서양 시계 기술이 동아시아에 들어온 흔적이다. 지금 1만 원권 뒷면에 있는 그 기계다.
그리고 근대가 왔다. 1896년 태양력을 쓰기 시작했고, 1908년 대한제국은 표준시를 UTC+8:30으로 정했다. 같은 해 4월부터 경복궁에서 정오를 알리는 대포, 오포(午砲)가 울렸다. 시계가 귀하던 시절, 도시 전체가 대포 소리로 점심시간을 알았다. 나중에 대포는 사이렌으로 바뀌었다. 이상의 소설 「날개」(1936)에 나오는 "정오 사이렌"이 그것이다.
표준시는 이후 정치를 따라 움직였다. 1912년 일본에 맞춰 UTC+9, 1954년 다시 +8:30, 1961년 다시 +9. 시간을 정하는 일은 언제나 권력의 일이었다. 세종이 자격루를 나라의 표준으로 삼았을 때부터 그랬다.
백성의 하루를 쥔 종소리
그렇다면 이 시계는 백성의 삶에 정말 영향을 줬을까.
한양 사람들에게는 확실히 그랬다. 자격루가 알린 시각은 사람 손을 거쳐 광화문으로, 다시 종루(지금의 보신각 자리)로 전해졌다. 거기서 울리는 두 번의 종소리가 도성의 하루를 열고 닫았다.
- 인정(人定): 초경 3점에 종을 28번 쳤다. 도성 8문이 닫히고 통행금지가 시작된다. 28은 하늘의 별자리 28수를 뜻한다.
- 파루(罷漏): 5경 3점에 종을 33번 쳤다. 문이 열리고 통행이 풀린다. 33은 불교의 33천을 뜻한다.
1536년 중종 때 새로 만든 자격루는 이 인정과 파루까지 자동으로 칠 수 있게 개량되었다. 도성의 문이 물방울에 맞춰 열리고 닫힌 셈이다.
통금을 어기면 경수소에 갇혔다가 다음 날 곤장을 맞았다. 재미있는 건 형량이 시각에 따라 달랐다는 점이다. 초경과 5경에 걸리면 10대, 2경과 4경이면 20대, 한밤중인 3경이면 30대. 밤이 깊을수록 벌도 깊었다.
여기서 한 가지가 눈에 걸렸다. 인정과 파루는 경점으로 정해진 시각이다. 경점은 계절마다 움직인다. 그렇다면 통행금지 시각도 계절마다 움직였어야 한다. 계산해 봤다.

파루는 여름에 새벽 3시 40분 무렵, 겨울에 5시 30분 무렵이다. 두 시간 가까이 움직인다. 인정도 겨울엔 저녁 7시 무렵, 여름엔 9시 넘어서까지 오르내린다.
흔히 인정은 "밤 10시경", 파루는 "새벽 4시경"이라고 소개한다. 파루는 계산과 대체로 맞는데, 인정은 규정대로 계산하면 그보다 꽤 이르다. 초경을 어디서부터 세는지 같은 해석 차이일 수도 있고, 실제 운영이 규정과 달랐을 수도 있다. 이 부분은 열린 질문으로 남겨 둔다. 확실한 건, 조선의 통금은 해를 따라 움직이는 시간이었다는 것이다.
다만 과장은 하지 말자. 한양 밖 대부분의 백성에게 자격루의 종소리는 닿지 않았다. 농민의 삶을 좌우한 건 몇 시 몇 분이 아니라 언제 씨를 뿌리고 언제 거둘지, 즉 절기와 역법이었다. 자격루는 '나라의 시간'이었고, 그 나라의 시간이 가장 촘촘하게 닿은 곳은 도성이었다.
그 도성의 리듬은 생각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1945년 9월부터 시작된 야간 통행금지는 1982년 1월에야 풀렸다. 형태는 달랐지만 '밤에는 다니지 마라'를 나라가 정해 알리는 일은 인정의 종소리에서 사이렌으로 이름만 바꿔 이어졌다. 우리 부모 세대까지는 그 종소리의 먼 메아리 속에서 살았던 셈이다.
에필로그
자격루를 따라가 보니 장영실의 진짜 발명은 물시계가 아니었다. 물시계는 그 전에도 있었다. 그가 만든 건 오차를 다루는 체계였다.
수압의 오차는 계단식 항아리로 걸렀다. 쌓이는 오차는 매일의 리셋으로 끊었다. 계절의 오차는 잣대를 갈아 끼워 맞췄다. 남은 오차는 하늘로 검산했다. 한 번에 완벽한 기계를 만드는 대신, 불완전한 부품들이 서로의 빈틈을 메우게 했다. 좋은 엔지니어링은 지금도 그렇게 생겼다.
하나 더 생각나는 게 있다. 조선의 밤 시간은 해를 따라 늘고 줄었다. 우리 몸의 시계도 그렇다. 생체시계는 매일 아침 빛을 보고 0점을 다시 맞춘다. 자격루가 맑은 날 해시계로 검산했던 것처럼.
지금 우리는 계절과 상관없이 똑같이 흐르는 시계에 맞춰 산다. 겨울에도 여름처럼 일어나고, 여름에도 겨울처럼 잔다. 시계는 정확해졌는데 몸은 가끔 길을 잃는다.
600년 전 한양의 밤은 겨울이면 길게, 여름이면 짧게 흘렀다. 물방울은 그 고무줄 같은 시간을 묵묵히 세고 있었다.
참고 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자격루 — 1434년 제작, 파수호 4·수수호 2·살대 12 구성, 현존 유물(1536년) 치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인정, 파루 — 인정 28회·파루 33회 타종, 통금 위반 처벌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시보, 인정과 파루 / 야간 시제, 부정시법 — 인정 초경 3점, 파루 5경 3점, 혼·신 2.5각 규정, 세종대 밤 잣대 11개, 1791년 시보 착오 사례
- 한국천문연구원 천문우주지식정보, 물시계와 자격루 — 1455년 중지, 1469년 재가동, 1536년 신제작, 1653년 시헌력 이후 자동 시보 제외
- KISTI 과학향기 (2022), 계절마다 다른 밤의 길이를 알린 자격루의 원리 — 2021년 인사동 출토 주전 동판과 절기별 잣대 판별
- 국립중앙과학관 (2022), 자격루 주전(籌箭) 시스템 복원 발표 — 출토 부품과 기록을 대조한 '두뇌' 복원
- Lee, Y. S., Kim, S. H., Jeong, J. H. (2009), Automatic Clock and Time Signal System of the Astronomical Agency in East Asia Area, Journal of Astronomy and Space Sciences 26(3) — 동아시아 자동 시보 체계 비교
- 이용삼 (2023), 시계왕국 조선, 제13회 해시계학술대회 초록 — 자격루·옥루·혼천시계 작동 모델 복원
- Korea JoongAng Daily, The siren's call — 1908년 오포, 정오 사이렌
- Wikipedia, Time in South Korea / Honcheonsigye — 표준시 변천, 혼천시계 연대 논쟁
- 그림 1·5: 서울(37.57°N) 2026년 일몰·일출 데이터로 직접 계산. 그림 3: 토리첼리 법칙 기반 단순 모형으로 직접 계산(가정은 그림 하단 표기)
